기획자가 기획안을 디자이너에게 넘긴다. 디자이너는 기획안을 토대로 작업물을 만든다. 초조하게 시간이 흐른다. 마침내, 설레는 마음으로 작업물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딘가 묘하게 흡족하지 않다. 기획자가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며 피드백을 준다. 하나 둘 쌓여가는 피드백에 놀란 디자이너가 점점 감정적으로 변한다.
디자이너와 작업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일상적인 상황이다. 얼마전 팀원이 디자이너와 비슷한 실랑이를 벌였다. 양측의 입장을 들어보며 중간에서 잘 중재하고, 다행히 마무리는 지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했던 팀원에겐 그 기억이 상흔처럼 남아 있었다. 남 탓만 하면 성장할 수 없기에 이 일을 계기로 디자이너와 더 협업을 잘하기 위해 반성하는 타임을 가지자고 달랬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항상 마찰이 일어나는 부분은 크게 3가지다.
1. 기획의 완성도
기획자들은 보통 일정에 쫓긴다. 일정에 맞추려면 빨리 이 기획안을 디자이너에게 넘겨서 작업이 시작되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이 더 크다. 머릿 속으로 대략의 그림이 있거나, 아니면 아예 없을 때도 있다. 진짜 급할 때는 디자이너와 함께 만들어가면서 기획 방향을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위험한 사고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은 당연히 촘촘할 수 없고, 촘촘하지 못한 만큼 디자이너에게는 제대로 기획의도가 전달되지 않는다. 파탄의 시작이다. 기획자가 더 고민하고 더 고생할수록 기획안은 탄탄해지고, 이후 작업자들도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게 된다. 기획이 8할인 셈이다.
디자이너에게 기획의도를 제대로 인지시켜야한다. 명확한 그림이 있다면 최대한 구체적으로 기획안을 작성해야 한다. 명확한 그림이 없다면, 대략적인 방향과 들어가야 할 최소한의 정보를 넣고 나머지는 디자이너에게 자율성을 줘야 한다. 서면으로 부족하다면 따로 미팅을 잡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기획 초기 단계부터 전략적으로 이들을 개입시켜서 해당 작업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방법이다.
2. 일정의 여유
회사에서 넉넉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급박하게 처리해야 할 태스크들은 항상 많다. 많이 양보해서 디자이너에게 허용 가능한 시간이 1~2일 밖에 없다. 소위 쪼아야 하는 시간이다. 미안함과 급박함을 동시에 안은채 작업물을 기다린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충분히 고민할 시간 자체가 없는 상황. 빠르게 작업을 하다보면 퀄리티를 포기해야 할 때가 많아진다. 쫓기며 작업하는 것의 퀄리티가 좋을리가 없다. 문제는 작업을 의뢰한 기획자가 정작 퀄리티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 디자이너가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충 만든 것 같아 실망하게 된다.
기획자들은 없는 시간 속에서도 시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협상력이다. 얼마나 넉넉한 일정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기획자의 역량이다. 상대방의 무리한 요구는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일정이 넉넉할 수록 디자이너와의 작업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수에 좀 더 효과적으로 대응이 가능하다.
3. 피드백의 적절성
디자이너도 사람이다. 작업물의 퀄리티를 엄정하게 평가 받을 때는 사소한 피드백도 아플 수가 있다. 피드백을 줄 때는 최대한 그들의 감정을 배려해 세심하게 단어를 고르고 골라야 한다. 이런 부분의 섬세한 배려가 부족하면 종종 건설적인 피드백이 본 의도와 다르게 '지적질'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그 차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피드백을 주는 톤앤매너도 중요하지만, 그 피드백이 정말 중요했는지도 따져 볼 일이다. 디자이너가 미학적으로 고민해 배치한 부분을 기획자의 주관적 취향으로 평가해버리면 '영역을 침범당한' 것처럼 느끼거나, '전문성을 무시당한' 것처럼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획의 방향에 치명적인 결함을 주는 배치나 디자인이라면 물론 수정을 요구하는게 맞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이라면 어느정도 타협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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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관건은 밀당이다. 기획자는 프로젝트를 시간 내에 완수해야 하는 목표가 있다.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하면서도 잘 쪼아서 목표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양가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협업은 그래서 어렵다. 하지만 서로의 티키타카가 잘 맞아 환상적인 결과물로 이어지면 또 그만큼 성취감을 주는 일도 없다. 세상의 모든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조화로운 작업을 부디 잘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