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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조건

 

그럴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시간이 훅, 지나가버렸을 때. 정신 차리는 순간 '어딘가'에서 현실세계로 걸어나오는 느낌이랄까. 주변의 누군가가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하고, 의식 못했던 소음이 또박또박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외 없이 찾아오는 기분 좋은 느낌과 확신.

 

'몰입 했구나'

 

이런 몰입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떤 결과물이 내 눈앞에 있다. 평소라면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었을 작업이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춘 상태로 말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안지났다면, 시간까지 덤으로 선물 받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최근에도 일을 하며 이런 순간을 경험하고, 문득 궁금해졌다. 몰입의 경험은 언제 오는지.

 

1. 정복 가능해보이는 일의 수준

이 일은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해낼 수 있겠다,하는 어떤 직감이 있을 때 몰입이 더 쉬웠던 것 같다. 난이도가 높아 보이는 작업은 시동을 거는 데만 시간이 오래 걸렸고, 조금만 어려운 점에 봉착해도 의욕이 쉽게 떨어졌다. 그렇다고 난이도가 낮으면 쉽고 빠르게 해내도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다. 종이 복사에 몰입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감당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이 중요하다. 

 

2. 중도 과정에서 겪는 성취감

되짚어보면 최근에도 몰입에 이르기 바로 직전까지는 전혀 몰입스럽지 않았다. 뭔가 피곤하고, 하기 싫은 마음도 들었다. 꾸역꾸역 자료를 찾았다. 반전은, 찾은 자료들을 재구성해 하나의 장표를 완성한 순간이었다. 뿌듯했다. 그 뿌듯함이 연료가 돼 속도가 붙더니 마지막까지 곧장 달려갔다. 과정 속의 작은 성취감이 조건이라면 조건이다.

 

3. (아는) 사람 없는 환경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순간, 아지트를 찾는다. 사무실에서는 빈 회의실, 밖에서는 자주 가는 동네 카페가 내 아지트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몰입의 순간이 많았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꽉 들어찬 카페에서도 몰입이 가능했던 걸 보면 중요한 건, 내가 의식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 여부인 것 같다. 항상 회의실이나 카페에만 상주할 수는 없는 일이니 사무실 내 자리를 최적의 아지트로 만들면 베스트일텐데, 그게 참 어렵다. 오며가며 모니터를 흘깃거리는 상사, 동료의 한탄을 신경쓰다 보면 몰입의 근처에도 못간다.

 

 

적고 보니 몰입이란 녀석을 맞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보인다.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 아직 한참 멀었다.